그분의 마음
김옥화
지난 가을에 시어머님이 위출혈로 입원하셨다. 시누이들과 동서와 돌아가면서 간병을 했다. 가을걷이로 바쁜 나는 낮에는 일을 하고 밤 시간에 병원으로 갔다. 깊은 밤 입원실은 소등을 하여 고요했다. 나는 간이 의자에 앉아 자판기에서 뽑아 온 커피를 마셨다. 주무시는 줄 알았던 어머님이 살며시 내손을 잡으셨다. 그리고 들릴 듯 말 듯 말씀하셨다.
“내 곁에 있어줘서 고맙다. 아범이 없어도 너는 내 큰 며느리다.”
남편이 떠난 지 삼년이 되어간다. 다급하게 달려간 병원, 응급실과 중환자실을 전전하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7월 어느 날, 그는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났다. 엉겁결에 떠나보낸 그의 빈자리는 곳곳에서 한숨으로 대신했다. 남편을 보낸 나는 백 년 만에 찾아왔다는 무더위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지냈다. 무심한 시간은 소리 없이 계절의 옷을 갈아입으며 잘도 갔다. 늦가을, 무성한 잡초 속에서도 들깨는 알알이 영글었다. 영근 들깨는 꽉 찬 내 눈물샘 같이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후두둑 후두둑 알갱이를 쏟아냈다. 밭고랑을 누비며 흘린 눈물이 거름이 되어 곡식을 자라게 했다.
그해 겨울은 온전히 시어머니와 나와의 시간이었다. 어머니는 집으로 전화해 내가 받지 않으면 내 휴대폰 번호를 눌렀다. 휴대폰 알림 창에 ‘어머니가 뜨면 몇 번 울린 후에야 마지못해 전화를 받곤 했다.
평양이 고향인 어머니는 6.25 때 혈혈단신으로 이웃 따라 피난 내려와 먼 일가조차 없이 외롭게 사셨다. 당신의 혈육이라곤 오로지 당신 몸으로 낳은 4남매뿐이었다. 어머니는 술을 좋아하시는 시아버님주사에 지옥 같은 곳에서 멀리 도망치고 싶은 날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어린 자식들이 눈에 밟혀 보따리를 풀 곤 했었다는 가슴 저린 이야기를 들려주신 적이 있다. 그렇게 힘들게 키운 자식들 출가시키고 손자 손녀 낳고 커가는 모습과 불어나는 살림살이를 바라보는 것이 그분의 큰 낙이었다. 그런데 건강하게 잘 살줄 알았던 마음에 기둥이었던 장남을 졸지에 잃었다. ‘부모는 산에 묻고 자식은 가슴에 묻는다’ 는 말이 있듯이 자식을 먼저 보낸 마음 오죽 하실까만, 시어머니는 홀로된 며느리가 염려되었는지 며칠에 한 번씩 내가 전화를 받을 때까지 수화기를 놓지 않으셨다.
시어머니는 나에게 살갑던 분이 아니다. 나 역시 어머니께 며느리로서의 의무만 했을 뿐 특별한 정을 주지 못했다. 어느 해 봄, 우리 동네 오 일 장이 서는 날이었다. 어머니는 장에 왔다가 들렸다며 검은 비닐봉지 두 개를 손에 들고 오셨다. 장에 오셔도 바쁘다고 잘 들리지 않으시던 분이 웬일인가 했다. 내심 들고 계신 비닐봉지 속이 궁금했다. 어머니는 내 눈길을 의식하셨는지 꽁꽁 묶은 비닐봉지를 풀러 속에 담긴 물건을 하나씩 꺼내놓으시며 “큰 건 우리 며느리 꺼, 작은 건 우리 손자 꺼” 하셨다. 펼쳐 놓으신 것은 크고 작은 알록달록한 양말이었다. 거기에 우리 것은 없었다. 나는 속으로 ‘그 깐 시장표 양말 몇 푼이나 한다고 사람 마음을 뒤집으시나’ 하며 투덜댔다. 어머님이 말씀하신 우리 며느리는 당신과 같이 사는 막내며느리였고 손자 역시 함께 사는 손자였다. 전에도 어머님이 우리 집에 오시면 음식솜씨 좋고, 일 잘하는 우리 며느리, 결혼 육년 만에 낳은 잘생긴 우리 손자하며 이웃집 며느리한테 말하듯 자랑을 하셨다. 매일 따신 밥해 주는 며느리가 예쁘고, 고사리 손으로 어깨 주물러 주고 등을 두드려 주는 손자가 얼마나 귀여울까. 하지만 나도 며느리다. 매번 이웃집 며느리 취급 받는 것 같아 마음 상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랬던 분이 시도 때도 없이 나에게 전화를 걸고 끼니를 걱정하는 것이다.
겨우내 방치해두었던 농막을 정리하고 지난 가을에 걷지 못한 밭이랑에 널린 폐비닐을 걷다 보니 어영부영 점심때가 되었다. 휴대폰이 울렸다. 들어와 점심 먹으러오라는 어머님 호출이었다. 꾸물거리면 재차 전화를 하시니 가지 않을 수 없었다. 흙먼지 잔뜩 묻은 차림으로 어머니 집에 들어갔다. 어머니는 이번에도 아침밥은 먹고 일하느냐고 물으셨다. 나를 바라보는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주방으로 향하는 나를 잡아 앉히고는 어머님이 손수 밥상을 차렸다.
자주 가는 인터넷 카페 게시판에 60대 회원이 올린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직장에 다니는 며느리가 퇴근시간 즈음에 ‘어머니, 저ㅇㅇ먹고 싶어요’ 라는 전화가 오면 반찬을 만드는 내내 맛있게 먹는 모습이 떠올라 기분이 좋다고 했다. 경우는 다르지만 나도 그 짝이 되었다. 나는 밥상 앞에 앉아 어머님이 차려준 밥을 물에 말아 들기름에 달달볶은 묵은 지 얹어 꾸역꾸역 한 그릇을 다 비웠다. 식사가 끝날 때를 기다려 어머니는 인스턴트커피를 준비해 놓고 커피포트에 물을 끓였다. 설거지라도 하려 했지만 그것도 말리셨다. 커피 타놨으니 식기 전에 얼른 와 마시라고 성화였다. 나는 내가 밭에서 일하는지 어떻게 아셨느냐고 어머니께 여쭈었다.
“응, 옥상에 올라가서 산 아래 쪽을 보면 어멈이 밭에 왔다 갔다 하는 거 다 보여!”
그 말을 듣는 순간 목구멍이 막힌 듯 커피를 삼킬 수 없었다.
옥상으로 연결되어 있는 계단은 내가 오르내리기에도 가파르다. 관절이 성치 않아, 지나가는 바람에도 위태로운 구순이 다 된 어머니한테는 위험한 계단이었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아침마다 계단 난간을 짚고 엉금엉금 옥상에 올라가 혼자 일하는 며느리를 살폈던 것이다. 남편이 있던 빈자리는 누가 대신해 준다고 채워지는 자리가 아니다. 그 자리를 어머니께서 대신하고 계셨다. 구멍이 뚫린 듯 허전한 가슴을 차곡차곡 메워주며 한발씩 내게로 다가오신 어머니, 나는 오늘 그분의 마음을 읽고 있다.
'좋은글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련은 인생을 아름답게 한다 (0) | 2020.05.26 |
---|---|
시간은 잔액이 없다 (0) | 2020.04.10 |
우리네 인생길 (0) | 2020.03.16 |
아름답게 나이들게 하소서 (0) | 2020.01.13 |
구부러진 길-김준관 (0) | 2019.08.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