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대소가(大小家)의 안팎에서는 이른 아침에 채비를 하여 원뜸으로 올라가고,호제와 머슴들도 집을 비웠다.
어른들이 그러니 아이들까지도 덩달아 고샅을 뛰어다니며 신이 나서 연방 무어라 재재거렸다.그리고 가까운 촌수의 동서 숙질(叔姪)의 부인들은 아예 며칠 전부터 올라가 있기도 하였다.
그런 마을의 동쪽 서래봉(瑞來峰)과 칼바위 쪽에 두툼하게 엉키어 있는 회색의 구름은,그러나 중천에 이르러는 엷은 안개처럼 희부옇게 풀려 둥근 해의 모양을 드러내 보여 주었다.아무래도 구름에 가려진 햇발이라 온기가 느껴지지는 않았지만,그런대로 이만한 날씨라면 큰일 치르기에 그다지 애석한 것은 아니었다.
벌써 마당에는 넓은 차일을 치고 그 아래 멍석을 깔아 두었으며, 멍석 위에 펼 화문석까지도 깨끗한 행주질을 몇 번이나 하여 대청마루에 내다 놓았다.그리고 교배상을 챙긴다.
서래봉의 줄기에서 갈려 나온 낮은동산이 집터의 뒷등을 이루어주고 앞족은 툭 트여 마을이내려다보이며,마을 건너 강골과의 경계를 내고 있는 강 줄기가 비단 띠처럼 눈에 들어오는 남도 땅의 대실,이 집의 안팎은 지금 며칠째 밤을 새우고 있었다.
며칠째라고 하지만, 그것은 꼬박 밤을 새우면서 방방이 불을 밝히고 장명등이 꺼지지 않은 날수만을 그렇게 말하는 것이요,실상 분주하여지기 시작한 것은 이미 오래 전 혼인하자는 말이 오간 의혼(議婚)이 있고, 청혼서(請婚書)가 오가면서부터였다.
그러다가 지난 초여름,살구가 막 신맛을 올리며 단단하게 여물고 있을 때 도경(道境)을 넘어북도의 남원군(南原郡) 매안(梅岸)에서 사람이 당도하였다.
그는,신랑 될 사람의 사주(四柱)를 가지고 온 것이다.
주인 허담(許潭)과 부인 연일정씨(延日鄭氏)는 대청에 돗자리를 깔고, 정갈한 상을 앞에 하여, 정중하게 사주 단자를 받았다.
상 위에놓인 사주보는 네 귀퉁이에 금전지를 달고, 간지에 근봉(謹封)이라 쓰인 띠를 두르고 있었다.
그 다홍의 비단 보를 조심스럽게 펼치자 안족은 빛깔 고운 남색인데, 거기 흰 봉투가 들어 있고, 봉투는 봉함 대신 길고 가느다란 싸릿가지를 젓가락처럼 모두어 물리고 있었다. 싸릿가지는 본래 어른의 새끼손가락보다 조금 가늘지만 상서로이 날렵하게 벋은 것을 반으로 쪼개,봉투 앞뒷면으로 나누어 봉투를 물게 한 것이다.
봉투보다 길어서 뚜껑 위아래 양쪽으로 손가락 마디 하나만큼씩하게 솟아 나와 있는 싸릿가지 머리는,청실 홍실의 둥근 타래실이 얌전하게 묶였는데, 그것은 휘황하고 요려하게 굽이쳐 나뭇가지 앞면을 타고 내려오다가 꽁지를 휘이 감으며 뒷면 위쪽으로 올라가 서로 합해졌다.역시 매듭이 지지 않게 동심결(同心結)로 묶여 있는 것이었다.
허담은,그 청·홍의 타래실을 보며 눈에 웃음을 띄웠다.
그러고 나서부터 집안은 그야말로, 대문·중문은 말할 것도 없고 방문이며 부엌문,곳간문들이 제대로 여닫힐 겨를도 없이 분주해진 것이다.
정작 오늘은, 뒤안에서 흰떡이며 인절미를 만드느라고 내려치던 떡메 소리와 장작 패는 소리,그리고 밤낮을 모르고 집안을 울리던 찰진 다듬이 소리 같은 것이 멎어 놓아 차라리 조용한 편이라고 할 수 있었으나, 그 대신 사람들이 안채·사랑채·뒤안·부엌·앞마당·중마당·마루·대청 할 것 없이 그득그득 들어차 오히려 더욱 들떠 있었다.
콩심이는 안채 사랑채의 댓돌에 놓인 신발들을 가지런히 하느라고 조그만 몸을 더 조스맣게 고부리고 손을 재빠르게 놀리면서 정지 뒷문으로 가서 어미에게 적(炙)조각 얻어먹을 생각에 바빴다.
콩심어미는 부엌 뒷문간 곁의 뒤안에서 굵은 돌 세개를 섵발처럼 괴어 놓고 가마솥 뚜껑을 거꾸로 얹어 연방 기름을 둘러가며, 한 손으로는 이마에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소맷자락으로 씻어 올리면서 전유어를 지지고 있었다.
그 고소한 냄새 대문에 콩심이의 손은 더욱 빨라지고,작은 콧구멍이 자꾸만 벌름거려지는 것이었다.
전유어 냄새뿐만이 아니었다.
연한 살코기를 자근자근 칼질하여 갖가지 양념을 넣고 고루 간이 잘 밴 쇠고기를 꼬쟁이에 꿰어 석쇠에 굽는 냄새,같은 쇠고기가 들어가는
식이라도 도라지가 들어가 참기름에 섞이응 냄새들이 집 안팎은 물론 온 마을까지 바람을 타고 내려갔다.
솜씨가 좋은 서저울네는 생도라지를 소금물에 살짝 삶아 건지며 맛을 본다.그리고 간간한 도라지를 옹백이의 찬물에 우려내는 동안 후춧가루·소금·깨소금 ·파·마늘을 언뜻언뜻 챙긴 뒤에,다시 도라지를 건져내더니 순식간에 옥파같이 곱게 갈라 놓는다.
"얼매나 좋으까이?연지곤지에다."
옆에서 떡시루 번을 뜯어내고 있던 점봉이네가 혼자말처럼 탄식하며 부러움을 감추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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