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우늘* / 박은영
옛 터의 재를 모읍니다 고춧잎 깻잎에 고인 검은 빗물 받아 반죽을 합니다
잘 이긴 그날을 둥글게 굴려 돌담을 쌓고 정주석에 긴 숯 세 개를 걸쳐 놓습니다
늙은 아버지가 돌아오시기 전에,
나는 통시를 짓고 흑돼지 울음을 풀어놓습니다 재투성이 해가 수시로 드나들 수 있도록 뒷간의 문은 만들지 않기로 합니다 주인 없는 마을, 불카분낭**으로 기둥을 세웁니다 싹이 난 가지로 귀틀을 짜고 바람벽을 만들고 반죽덩이 뚝 떼어 물항아리를 빚습니다
검게 탄 별들이 다시는 목마르지 않을 한 채의 기억, 그슬린 자리에 창을 냅니다 오래전 불에 덴 서녘이 붉게 부어오릅니다
먼 길 마실 간 아버지가 탄내를 풍기며 돌아오시기 전에,
나는 헛산***에 새로 돋은 억새풀을 엮어 지붕을 올리고 풍채를 덧댑니다 이제, 불티같은 날들은 들이치지 않을 겁니다
마지막 반죽으로 아궁이를 만든 겹집의 구조
마중하는 손짓처럼, 검은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릅니다 노부의 귀가를 기다리는 초저녁
나는 정주석 숯 한 개를 뽑아 가만히 내려놓습니다
*제주4.3사건 당시 전소된 마을.
**'불에 타버린 나무' 라는 뜻의 제주 방언.
***헛묘, 시신이 없는 가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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