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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백초를 다 심어도 대는 아니 심으리

2 백초를 다 심어도 대는 아니 심으리라(25쪽~27쪽)

2 백초를 다 심어도 대는 아니 심으리라

 

  진주,산호,비취,청옥,백옥,밀화의 구슬들은 일룽거리는 촛불빛을 받아 오색의 빛을 찬연하게 뿜는다.

  금방이라도 좌르르 소리를 내며 쏟아질 것처럼 소담한 구슬 무더기가 꽃밭이라도 되는가,실낱같은 가냘픈 가지 끝에서 청강석 나비가 날개를 하염없이 떨고 있다.

  큰비녀를 감으며 양 어깨 위로 드리워져 가슴으로 흘러내린 고운 검자주 비단 앞댕기도 보이지 않게 떨리고 있다.

  앞댕기에 물려진 금박과 진주, 산호 구슬들이 파르르 빛을 띤다.

  마당을 가득 채우며 넘치던 웃음 소리, 부산한 발자국 소리, 그리고 사랑에서 간간히 터지던 홍소(哄笑)의 소리도 이제는 잠잠하다.

  온 집안을 뒤덮던 음식 냄새조차도 싸늘한 밤 공기 씻기운 듯 어느결에 차갑게 가라앉아 있다.

  점봉이네가 부엌 바라지를 걸어 잠그는 삐이거억 소리가 난 것도 벌써 한참 전의 일이다.

  밤이 깊을대로 깊은 모양이다.

  그러나 방안의 두 사람은 아직도 말이 없다.

  오직 밀촛불만이 촛대 앞에 놓인 작은 술상과 그 술상 위의 흰 술병,술잔, 그리고 밤,대추등을 비추면서, 신부의 등뒤로 펼쳐진 백수백복(百壽百福)병풍에 그네의 그림자를 드리워 주고 있다.

  신랑 강모(康模)는 미동도 하지 않고 그림처럼 앉아 있기만 한다.

  얼마 동안이나 지금 이렇게 마주 앉아 있는 것일까.

  (크다……)

  강모는 다만 아까부터 까닭을 알 수 없는 심정에 짓눌리어 몇 번이고 이 말을 삼키는 것이었다.

  눈이 부시게 찬연한 오색 구슬로 덮힌 화관이며 다홍의 활옷, 그 활옷에 수놓여진 길상(吉祥)의 문양들이 커다란 소매의 푸르고 붉은 노란 색동과 더불어 오직 마음을 어지럽게 할 뿐, 곱다든지 어여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아가 이 신방(新房)에 들었을 때 불빛 아래 앉아 있는 그네를 본 순간, 그 눈부시게 현란하여 울긋불긋 빛나는 색깔들이 덜컥하는 소리를 내며 가슴에 부딪혀 왔었다.

  겁이 났다.

  섬뜻 무서운 마음이 들었다.

  그 섬뜩함의 찬 기운이 몸의 낮은 곳으로 스며들면서 자기도 모르게……어찌할꼬……,싶은 심정에 사로잡히고 말았던 것이다.

  "신방에 들거든 조금도 서두르지 말아라,겁을 내서도 안되지. 몸을 마음에 맡기면 그저 자연스러운 이치와 음양의 흐름이 있으니 모든 일은 저절로 이루워질 게다."

  남원의 매안에서 행장을 차리고 상객이 되어 대실로 길을 떠나며 부친 이기채는 혼행하는 강모에게 그렇게 일렀다.

  강모는 지금 그 말을 상기해 본다.

  음양의 흐름이 있으니……저절로……

  그는 다시 한번 가슴이 막힌다.

  "신방에 촛불은 꼭 손가락으로 꺼야 한다. 입김으로 불어 끄면 복 달아나. 알았지?

  길떠날 채비를 마치고 안방에 인사를 들어갔을때, 할머니 청암부인은 장가들러 가는 손자 강모의 손을 어루만지며 감개 어린ㅁ 목소리로 당부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촛불은 꺼지지 않은채 가끔식 타악,소리를 내며 튀어 올라 흔들면서 타고 있다.

  촛농이 한쪽으로 기울어 흘러내린다.

  신랑이 그러고 있으니 신부는 더욱더 굳은 침묵으로 입을 무겁게 다문 채, 눈을 지그시 내리뜨고 무슨 갑옷에 싸인 사람처럼 꼼짝도 하지 않는다. 다만 화관의 구슬들과 푸른 빛으로 떨리는 나비 날개들만이 불빛에 영롱할 뿐이다.

  "……참, 이 마을엔 대가 많드만요."

  드디어 강모는 입을 떼었다.

  깊은 강물 한가운데 가라앉은 것 같은 침묵의 물살에 그대로 떠내려가 버릴 듯한 위태로움을 말로든지 깨야만 할 것 같아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