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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백초를 다 심어도 대는 아니 심으리

백초를 다 심어도 대는 아니 심으리라(28쪽~30쪽)

그는 아까,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서 검푸르게 울창한 대나마숲을 보았었다. 마치 그 숲은 몸을 솟구치며 함성을 지르는 것 같았었다.

 그때 그는 왜 이 마을의 이름이 대실인가를 실감할 수 있었다.

 무엇이라고 입이 떨어지지 않는데 문득 그 생각이 도오른 것이다.

 신부는 대답이 없다.

 물론 첫날밤의 신부가 신랑의 말에 얼른 대답을 할 리가 없다.

 그것을 알면서도 신부가 무슨 말을 좀 해 주었으면 싶었다.

 강모는 그네가 태산 같기만 하다.

 내가 사는 매안에도 대는 많으나 이름이 대실이라 그런가, 이곳 대가 더 무성한 것 같습니다.매안은……매화'매'에 언덕 '안'자를 쓰니, 매(梅)난(蘭),국(菊) 죽(竹), 사군자에 매화와 대나무 상응 조화가 실로 아름다울 만한데……매화 언덕에 대나무 수풀이 우리 만난 인연의 그림이라면 얼마나 좋으리오.

  그렇게 말 머리를 떼어 보려 하던 강모는 웬일인지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아 그 말들을 그냥 삼키고 만다.

  그리고는 대신에 다른 말을 어렵게 꺼낸다.

  "옛노래에 이런 게 있는데요 내 언뜻 생각이 나니 들려 드리리다."

 

 

 백초를 다 심어도 대는 아니 심으리라

 살대 가고 젓대 을고 그리나니 붓대로다

 어이타 가고 울고 그리는 대를 심어 무삼하리오

 

그러다가 강모는 순간 아차, 싶었다.

아무래도 첫날밤의 덕담으로는 걸맞지 않은 실책을 저지른 것 같았다. 젓대(피리) 소리 구슬픈 것은 가을밤이 아니어도 가슴 에이고, 살대(화살)가 허공으로 날아가는 것은 비호보다 빨라서 살대같이 떠난 님, 젓대로 흐느끼며 부르다가, 기어이 어쩌지 못하고 붓대들어 그리운 정 적어가는 그 누구의 심경을 어찌하여 이 밤의 첫마디로 읊고 있는가. 당황하여 얼른 말 끝을 거두어 들이는 그의 얼굴이 굳어진다.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의 오우가(五友歌)도 있었련만 어찌 하필 이름도 알 길 없는 사람의 그 육자배기 가락이 떠올랐단 말인가.

  "대를 말한 글이라면 또 이런 시조도 있지요."

  강모는 변명이라도 하듯이

 

  나모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

  곧기는 뉘 시기며 속은 어이 뷔엿는다

  저렇고 사시(四時)에 푸르니 그를 좋아하노라

 

하고 읊조렸다.

  그러나  웬일인지 공소(空疎)한 느낌이 들고, 절벽 앞에 혼자 앉아 있는 것처럼 막막한 생각이 드는 것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이제 너는 한 여자의 주인이 되었으니 부디 어른으로서 갖추어야 할 풍모를 잊지 말고, 말시부터도 점잖게 대하여라. 명심해라."

하던 어머니 율촌댁의 모습이 눈앞에 보인다.

 아버지 이기채와 엇비슷한 모습으로 체수도 작고 단단하면서 소심한 얼굴이다. 그러나 그 용색은 단정하다.

  그리고 바로 뒤미쳐 강실이의, 돌아서다 말고 고개를 갸웃하며 이쪽을 보고 있는 뒷모습이보인다. 비칠 듯 말 듯 분홍이 도는 귀를 스치며 등뒤로 닿아 내린 검은 머리 끝에는 제비부리 댕기가 나붓이 물려 있다.

  붉은 댕기가 바람도 없는데 팔락 나부끼는 것 같다.

  수줍은 귀밑의 목 언저리에는 부드러운 몇 오라기의 머리털이 비단 실낱처럼 그대로 보인다. 그 실낱 같은 머리털은 햇빛 오라기인가.

  둥글고 이쁜 어깨가 손에 잡힐 듯하다.

  강모는 터지려는 한숨을 눌렀다.

  그리고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가슴이 크게 내려앉고 말았다.

  신부의 뒤편 병풍에 드리워진 시커먼 그림자를 보았던 것이다.

  그것은 엄청나게 커다랗고 무서웠다.

   장식이 현란한 화관에 큰비녀, 비녀를 감아내린 앞댕기 같은 것이 기괴한 모양으로 비죽비죽 솟아나고 부풀어 보이고 하여, 활옷을 입은 둥실한 몸체와 더불어 엄청나게 커다란 그림자가 촛불을 다라 흔들리는 것이었다. 촛불이 흔리자 그림자는 순식간에 천장으로 오른다.

  그것은 금방이라도 강모를 덮어 누르려고 두 팔을 벌리고 있었다.

  손이 떨리고 숨이 막혔다.

  온 방안이 그 그림자에 먹혀 버리고 말것만 같았다.

  그림자는 어둡고 크고 기세가 있었다.

  그것은 마치 올가미처럼 강모의 목을 조이며 강모를 그 어둠 속에 가두어 버리려 하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