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통장 속의 오후
정순(국문3)
잔고가 얼마 남지 않은 통장을 들고서
현금코너에 들른다
곧 새로운 무게로 모였다 헤쳐질 숫자들이 짐작되는
그짧은 동안에 통장을 넘겨다보며
나는 왜 세상의 부적절한 관계들을 생각했을까
내 통장 또한 너무 일찍
주는 사랑에 주저앉고 말았음일까
입금되기만 하면 신기루처럼 어디론가 출금되고 말 사연들
늘 뻘 밭처럼 강팍한 아들의 통장이 잠깐 떠올랐고
한 번도 대면한 적 없는 유선비와
어디에 쓰이는 지도 모를 이름들의 납부고지서들이
뇌리를 스쳐갔다
날마다 땀에 전 통장과 함께 현금코너를 들른다
재래시장 한켠 생선 냄새 나는 궤짝 사이에 쪼그리고 앉아
하루치의 푸른 목숨 대신 넘겨받은 구겨진 지폐 몇 장을
내 안의 숫자들이 동의해 주지 않는 용건들을 향해 날린다
골목 저쪽의 절약과 봄날 한때 절반의 외출로 견뎌낸
햇살들을 날리는 것이다
애써 편식을 변명으로 대며 그들의 외식 한 켠에서
소금처럼 찍어 먹던 저녁 한 끼와
몇번이나 집었다 놓았던 새 옷 한벌을 송금하는 것이다
철컥, 또다른 가난의 분량이라도 검증해 주듯
기계음이 울리고 몇 개의 알리바이 숫자들과
아직은 유효하게 남아있는 찌거기 잔액들을 헤아리며
365코너를 나서다 문득 올려다본 하늘
팔월 중순의 가난한 구름 몇 점 서풍에 밀려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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